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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 당긴 방아쇠 -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완결)
조회 : 3,647
Z6s4b979 | 트랙백
2019.08.02 01:02
(3편) https://www.fmkorea.com/1318312017

- 전편들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

태극기.jpg 절망 속에 당긴 방아쇠 -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완결)


네. 진짜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사실 이글 쓸때는 한.일 갈등이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시기가 참 묘해지게 되었네요.


3편이 쓰여진 시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글은 자그마치 10개월을 묵혀둔 글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지 않은건 아니고 쓰기는 예전에 거의 마쳐두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지금까지 꺼내지 않은 이유. 그건 1907년 오늘 바로 지금 이 시각. 대한제국군 시위대가 해산에 불응하고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입니다.


나무위키에서는 이 전투를 조선 건국후 한양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라고 표기했지만.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청일 전쟁 직전 경복궁 쿠데타가 벌어졌기 때문이죠. 얼마전 드라마 <녹두꽃>에서도 나왔죠.(사실 이 전투를 제대로 다룬 거의 유일한 드라마이기도 하죠) 당시 평양 기영병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들은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맹전했으나. 결국 병력 부족과 전근대적인 군령 체계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고종의 신변을 내주며 패배했습니다.


그 전투는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겠죠.


오늘은 남대문 전투 이야기를 마저 하려고 합니다. 사실 전투 배경과 전개에 대해서는 1-2-3편으로 이어지는 동안 모두 마쳤습니다. 오늘 할 이야기는 뒷이야기입니다.


먼저 한가지 정정할게 있습니다. 전편에 제가 당시 시위대 병사들의 주무장을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으로 지목하고 이들이 단발식 소총이라 일본군 상대로 화력에서 밀렸다고 서술한 바 있습니다만. 사실 대한제국도 1905년에 기기창을 설치하고 일본제 아리사카 소총을 양산해서 이들 시위대에게 최우선 보급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실상은 똑같은 소총으로 맞상대했습니다. 

물론 무기와 탄약 모두 워낙 부족한데다 감제고지를 내준 점. 중화기 부재로 인한 화력 열세는 뒤집을 도리가 없었겠지만 말이죠. 
(일본군이 2개 대대를 털었다면서 노획한 무기가 소총 74정에 실탄 3,305발에 불과했습니다. 소총이야 빼돌렸다쳐도 탄약은 말 그대로 대대가 한탄창씩 가진거나 다름없네요) 

세브란스병원.jpg 절망 속에 당긴 방아쇠 -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완결)

당시 몇 안되던 제대로된 의료기관인 세브란스 병원에는 부상당한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은 지금도 이 기록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2017년 역사기록화의 형태로 이를 남겼습니다. 일본군은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이들 패잔병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운이 좋은건 아니었죠.

1900년에 태어난 한 사람의 사내 아이가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궁내부 관리의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죠. 당시는 갑오개혁 이후 노비라는 신분이 사라진 시기였지만 늘 그렇듯 현실에 적용되기까진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깨어있던 아이의 아버지는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그 노비들 중에 정태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힘이 원체 장사였던 그를 눈여겨본 아이의 아버지는 그가 대한제국 시위대 군인으로 복무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에 배속되어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네. 전편들 보신 분들은 아시겠죠. 지휘관이었던 박승환 참령 자결 이후 마지막까지 항거한 바로 그 부대입니다.

병영은 점령 당했지만 도망친 시위대와 일본군 사이에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정태규 역시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총상을 입고 간신히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는 과거 주인의 집으로 가던 중 집 바로 앞 고랑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정태규는 군인이 되어서도 군복을 입고 수시로 옛주인의 집을 들락거리며 아이를 돌봤고. 아이 역시 그를 삼촌처럼 따르며 좋아했습니다. 어릴적 우상 같은 존재였죠. 그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는 충격에 빠졌고 깊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아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 아이가 누구고 커서 무엇을 했을까요?

바로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철기 이범석 장군입니다.

이범석함장병들.jpg 절망 속에 당긴 방아쇠 -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완결)

이 사례를 보듯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항전은 분명 심지 끝에서 마지막으로 솟아오른 촛불이었지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건 아닙니다.

시위대의 항전을 전해 들은 원주 진위대를 비롯한 일부 진위대도 반기를 들어 일본 경찰들과 교전을 벌이는 등 항쟁을 이어갔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의병들에 합류했습니다. 이로서 정미 의병은 사실상 '의병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투력이 급상승했고 서울 진공 작전까지 벌였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총대장의 낙향과 더불어 실패하고 남한 대토벌을 거치면서 사라져갔죠. 

대신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독립운동 거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의병들은 한인 무장단체로 바뀌어 자리잡게 됩니다. 아직까지 이들에 합류해있던 대한제국군은 교관으로 바뀌어 이들을 지도하게 되죠.


물론 모두가 이런 숭고한 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건 않았습니다. 상당수의 군인들은 항쟁을 포기하고(3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사실 워낙 절망적인 상황이어서 이해가 안가진 않습니다) 은사금을 받고 낙향했거나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 헌병 보조원이라는 이름으로 일진회원들과 함께 의병들과 전투를 벌입니다. 의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사상자가 비교적 적었던 이유도 러일 전쟁 직후 전투 경험이 충만한 일본군의 전투력이 강했던 것도 있으나 이들을 앞세워 사실상 대리전을 치른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도 없고 일본군에 협력하기도 거부한 상당수의 군인들은 세월 속에서 그대로 잊혀져갔습니다.


아직까지 해산되지 않고 남은 장교들 중에서도 모두가 친일파였던건 아닙니다. 노백린을 비롯해서 유동열. 전에도 언급한 이갑(이때는 군복을 벗은 상태였습니다만). 이동휘(임정내 공산파를 이끈 그 사람 맞습니다) 등이 효충회를 구성해서 친일파들 암살을 노리기도 했습니다만 이내 좌절되었고. 이들은 제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김희선은... 생략하죠. 

또 마지막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입교생이었던 지대형은 폐교 후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3.1 운동이 일어난 그해. 중위신분을 버리고 신흥 무관학교에 합류해 독립군 내 유일한 일본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입니다.

지청천 장군의 2년 선배였던 김좌진 역시 군대해산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죠.

무관학교.jpg 절망 속에 당긴 방아쇠 -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완결)

특이하게 노백린은 군사학교장. 이동휘는 보병. 이갑은 포병. 유동열은 기병 병과를 지휘했었습니다. 참 고루고루 있었네요. 또 이갑의 친척 중에는 대한민국 국군 육참이랑 합참까지 나왔었습니다. (아.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은 분들은 아니지만)

훗날 대한민국 광복군은 자신들의 뿌리를 1907년에 해산된 대한제국군과 그 뒤를 이은 대한독립군의 후신으로 규정했고. 이들을 승계한 대한민국 국군 역시 남대문 전투를 국군의 뿌리 중 하나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처음 인용한 이미지 출처이기도 한 국방TV에서도 나온 부분이죠.


대한제국군은 분명 나라를 지키기엔 불충분한 형태였고. 대한제국 역시 오늘날 관점에선 좋게 보지 않을 요소가 많습니다. 비록 여러 사정이 있다하나 전제군주정의 군대로서 한계를 노출했죠.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친일파들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되기엔 억울한점 분명 존재합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은 다했으나 좌절한 분들과 앞장서서 나라를 배반한 사람들이 결코 같은 위치에서 평가받아선 안되겠죠.





미스터 션샤인은 진작 끝났고 해방된지 한참 지난 오늘. 112년전 작은 전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겠으나. 이 글을 보신 분들이라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은 선조들의 집념에 작은 경의를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한 자료 및 사이트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43_0050_0030_0010_0030
http://encykorea.aks.ac.kr/Search/List
http://www.sedaily.com/NewsView/1OJKYSH8HI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9/2018052903810.html
https://namu.wiki/w/%EB%8C%80%ED%95%9C%EC%A0%9C%EA%B5%AD%20%EA%B5%B0%EB%8C%80%ED%95%B4%EC%82%B0#s-2
https://namu.wiki/w/%EB%82%A8%EB%8C%80%EB%AC%B8%20%EC%A0%84%ED%88%AC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EiUu&articleno=4360887&categoryId=313385&regdt=20070420235308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m/view.do?ntt_writ_date=20180110&bbs_id=BBSMSTR_000000001232&parent_no=1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history3&mode=read&num=1197&page=31&ftype=6&fval=&backdepth=1